바라봄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26년 7월 16일

삼촌

봄을 맡아 피어나는 꽃내음을 쫓는 일이 써야 하는 마스크에 막혀버린 2020년의 봄, 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세계 모두를 두려움에 몰아넣은 코로나19도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아이의 출생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심장에 이상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를 고민에 빠트렸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불법체류, 정확히는 미등록이라는 조건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언가 도움이 될 방도를 찾다 우리 센터에 연락했던 것입니다. 모든 아이는 이 땅에 걱정이 아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음을 되새기며 인터뷰를 잡았습니다. U씨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날입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차, 카페로 들어서는 유모차가 보입니다. 카페 입구에 계단이 있어 유모차를 옮기는 걸 도우려 일어섰는데, U 씨가 아이가 실린 유모차를 가볍게 들어 옮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습니다. 가벼운 인사말을 나누다, 이야기가 지금 아이는 어떤지에 이릅니다. 지금 큰 문제는 없으나, 혹시나 아프면 어떡할까란 걱정을 꺼내놓습니다. 당장 이주민 영아에 대한 센터의 지원은 없지만, 함께 고민해 보자 대답합니다. 대화가 U 씨 신변에 닿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한국에 있으나,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아이에 대한 양육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아버지는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싱글맘인 외국인이 미등록 신분으로 심장이 아픈 아이를 홀로 키우겠다는 이야길 듣자니, 제게 어느 순간 축하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결국 마지막 물음을 꺼냅니다. “고향으로 귀환할 계획이 없냐” 묻습니다. 그러나 U 씨는 딸 A를 쳐다보며, 단호히 “이 땅에 가정을 일구겠다”라고 합니다.

감히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짐작하여, 당신에게 희망이 없다 말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가정을 위해, 센터 자원을 모으는 일과 더불어 U가 속한 국가 커뮤니티를 찾았습니다. 이들 공동체는 함께 이주해온 같은 고향이나 성씨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돕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U 가정도 커뮤니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하여, 해당 공동체 리더를 만나러 식당을 찾았습니다. U와 심장이 아픈 딸 A 이야기를 꺼내고 도울 수 있는 길이 없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른 이야길 꺼내 놓더군요.

“U 씨는 주말이면 이태원 클럽에 놀러 간다”, “일요일 새벽이면 XX 은행 앞에서 술이 취해 남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위와 같은 가십만을 앞세우곤 아이와 가정에 대한 지원 여부는 거론되지 않습니다. 더 이야길 해봐야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카운터에 있던 펜넬 몇 알로 입을 씻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도, 소문대로 U 씨가 정말 그러할까란 찜찜함은 남았습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던 당시, 시민사회단체의 후원도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도움받을 이들의 얼굴이나 신분을 노출해 후원을 독려하는 일을 빈곤 포르노라며 자제하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재난 가운데 도와줄 대상을 노출하는 단체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도움이 절실한 U 씨 가정에게도 이러한 제안이 왔고, 제가 이를 전했습니다. 가정 상황이 넉넉지 않을 텐데, 자기 딸의 얼굴과 자기 사연이 노출되면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되려, 우리 센터에서 받는 지원을 본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 미등록 이주 가정에도 나눌 수 있냐며 여러 가정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센터가 머물렀던 동네에 30년 넘게 지내온 이주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은 저와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어느 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고향 커뮤니티를 아끼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 사는 이 동네도 그렇게 여기는지. 그런데 제 질문 자체를 의아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향보다 머문 날이 많아진 이곳에서 이웃이라 불려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U는 달랐습니다. 이곳은 자기 딸의 고향이고, 자기 가정이 살아갈 동네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저를 이웃이라 불렀습니다. 그때 가슴에 얹혀 있던 한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선주민을 대상으로 한 이주인권 강의 자리에서 이주민을 우리 이웃으로 여기고 있냐 물었습니다. 한 분이 되물으시더군요. 그렇다면, 이주민은 우리를 이웃이라 부른 적이 있냐고 말입니다. (이 이야긴 나중에 다른 장으로 풀어놓겠습니다.)


이 땅, 우리 지역에 자리 잡고 가정을 일구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우리 센터가 멍석을 깔아주면 어떠할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위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U를 비롯한 이주민 당사자여야 하겠지요. U 씨의 딸 A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이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어머니를 따라 A도 미등록 체류 상태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머니 고향에도 출생등록을 할 수 없습니다. 서류상 어디에도 없는 아이인 셈입니다. 그래서 A는 언제든 어머니와 함께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놀이터에 나가 다른 아이들처럼 편히 뛰어놀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자리,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주가정이 모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해당 얘기를 U에게 꺼냈더니 찬성하며 여러 가정을 소개하더군요. 모임 가운데 어머니들은 한국어 등 필요한 교육을 받고, 아이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뛰어놀자란 계획을 함께 세웠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Our Kids)이 뛰어놀 울타리가 되어줄 OK 모임이 발족되었고, 자연스럽게 U는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U 가정과, A와 동갑인 아이를 둔 가정, 그리고 두 살 위 아이를 둔 가정을 포함한 세 가정이 모였습니다. 모임을 함께 준비하던 U는 어머니 가운데서 나이도 가장 많아 언니로서 모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들은 한국어 수업을 받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한살림 돌봄 선생님이 돌봐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임에 몇 가정이 더 참여하며 영글어가던 어느 날, U 가정의 A에게서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대부분 어머니 말과 한국어, 이중언어에 노출되어 말이 늦을 수 있긴 한데, 말을 못 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이들 부름에 반응하지 못하고 또래 아이들과의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발달 지연으로 보기엔, 벌써 어린이집에선 미술치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OK 모임에는 A가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며 자랑을 하더군요. 자랑과 달리 A가 커가면서 본인의 욕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등의 행동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무렵부터 U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이 아버지 이야기도, 홀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다짐도 건네던 그녀가 A 사정은 우리에게 꺼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A의 이야기이니 차마 말이 되어 나올 수 없었겠지요.

어느 날, U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았습니다.

“Hello, how are you? I’m planning to go back XXXX this month”

“안녕, 잘 지내시죠? 이번 달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이를 받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마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걸 저는 느꼈던 모양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카페에서 U를 다시 만났습니다. 얼마 전 동생이 하늘나라로 돌아갔고, A에게 자유 없는 삶을 물려줄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더군요. 그간 한국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듣고 카페를 나서는 길, 공항에 나가 귀환을 배웅하겠다 약속했습니다.

한국에서 마지막 날, 말없이 공항 출입국사무소에서 서류를 제출하고 티켓팅을 하는 등 출국 제반 준비를 도왔습니다. 무엇이든 말을 꺼냈다간 U 가정과 헤어지는 마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출국장 앞에선 A도 다른 아이들처럼 제 눈을 바라보며 “삼촌”이라 부를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A는 헤어지는 길에 잘가라고 이름을 부르는 저를 끝내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제 탓인 양 아직까지 그 순간, 그 기억이 무겁게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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